(칼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게티스버그는 워싱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 접경의 자그마한 마을로, 이곳에서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가 벌어진 것은 1863년 7월 2일이다. 병력은 남군 7만5,000, 북군은 10만 명이었다. 일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승리의 여신은 북군 편이었다. 7월 4일의 묘지능선 전투에서 남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3일 간에 걸친 무시무시한 백병전이 끝났을 때 게티스버그의 평온하던 들판은 주검으로 가득 메워졌다. 북군 역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아무리 고상한 목적을 위해서도 전쟁의 참화는 남북을 떠나 사람들 모두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게티스버그에서 전몰자들을 위한 묘지와 충혼탑이 건립되고 링컨은 11월 19일 헌납식에 참석 유명한 추도 연설을 했다.
“세계는 여기에 쓰러진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싸운 사람들이 훌륭하게 추진해 온 미완성의 사업에 몸을 바쳐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살아 있는 우리입니다. 그 대사업이란 이들 명예로운 전사자들이 최후까지 온 힘을 다해 싸운 대의에 대해 우리가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하는 것,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으로 새로운 자유의 나라로 탄생시키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게티스버그에서 남북전쟁은 사실상 승패의 판가름이 났다. 전쟁은 2년을 더 끌었지만 이는 순전히 최후까지 명예를 지키려는 남부인들의 자존심과 용기 때문이었다. 1865년 4월 9일 리치몬드가 북군에 함락되면서 4년에 걸친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날 링컨의 연설은 총 266개 단어에 불과하지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민주주의 정치이념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짧은 연설이 가져온 파장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광범위한 울림을 주고 있다. 정치사상과 철학, 문화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는 후세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